팬심에 대한 내용이라길래 궁금해서 읽게 되었다. 책 뒤표지에 '덕질이 불완전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불춘분한 덕질일 수도 있는 것이라고.'가 써있는데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터라 관심이 생겼다. 가끔 덕질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게 어쩌면 연애보다 더 숭고한 사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격한 사랑을 하고 계시는 분들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사실 이 블로그도 아이돌 덕질 글 올리려고 만들었다가 지금은 그냥 내 일상 블로그가 되었는데, 발 한 번 담갔다가 그런 덕질의 흐름을 잘 따라가지 못한 탓도 있다.
부제는 '케이팝 아이돌 논란과 매혹의 공론장'.
이 책은 팬덤보다는 아이돌의 논란을 놓고 벌어지는 여러 현상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초반에 아이유의 제제 논란이 나오는데 사실 난 해당 논란이 아이유의 예술적 욕심이 지나쳐서 실수한 거라고 생각해서 크게 공감가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많은 욕을 먹었다는 이야기에는 공감했다. 비슷한 시기에 표절했다며 짜집기 영상이 돌아다닌 걸 생각하면 어이없기도 하다. 러브윈즈 논란까지 보면 그냥 아이유는 사회에 대한 생각의 깊이가 깊지 않았을 뿐이지 실력이 뛰어난 아티스트가 맞는데 말이다. 솔직히 아무리 깊지 않아도 다른 남성 가수들에 비하면 나은 것 같기도 하고.ㅋㅋ
캔슬 컬처(cancel culture)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미국의 캔슬 컬처는 '혐오표현을 쓰면 안 된다 vs 표현의 자유다'가 주요 논쟁거리인 반면에 한국의 캔슬 컬처는 논쟁보다는 배신감과 열등감으로 인한 참교육 정서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감히 여자가'라는 생각 때문에 여성 연예인에 대한 논란에 더 호들갑을 떠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아이돌 산업에서는 같은 수준의 논란이 터져도 여돌이 남돌보다 더 큰 질타를 받는다. 소수자들의 인권을 위해 시작된 캔슬 컬처가 오히려 사회적 소수자에게 더 가혹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대중의 특징 중 하나인 집단적 도덕주의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우리가 흔히 언급하는 아이돌의 인성이라는 걸 '"구조의 부조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며, 주어진 결과에 순응"하고 실패는 자신의 탓으로, 성공은 팬이나 프로듀서, 다른 멤버들과 같은 타인의 덕으로 돌리는 태도'라고 설명하는데 정말 한 문장으로 잘 정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잘해서 잘 된 거라고 하면 오만하다고 욕먹기야 하겠지만ㅋㅋㅋ 겸손하지 못한 걸 굉장히 까고 싶어 하는 분위기는 있다. 무조건 팬들 덕분이라고 꼭 붙여야 한다. 수익으로 먹고살며 작업한다고 생각하면 팬들 덕분인 게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실제 팬들을 인터뷰한만큼, 논란이 있었던 아이돌의 이야기도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중심이 되었던 건 (여자)아이들의 전 멤버였던 서수진 학교폭력 논란이다. 그동안 아이돌판에서 학교폭력 논란이 많긴 했지만 서수진 사건은 자신이 피해자였다고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남긴 배우까지 나타나면서 그 파장이 남달랐던 걸로 기억한다. 이 사건은 결국 서수진이 해당 그룹을 탈퇴하면서 마무리지어졌다. 이후 서수진 측에서 자신은 학폭위에서 무죄를 받았으며, 선배들의 강압을 받은 피해자임이 드러났으나 대중은 오히려 학교와 학교폭력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인터뷰한 팬과 글쓴이는 이들의 불신이 학교폭력에 대한 진지한 논의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아이돌 아티스트들을 중심으로 터져 나온 학교폭력 논란들은 논란 속 아이돌 아티스트의 사과, 자숙, 은퇴 정도로 일단락된다. 성찰이 결여된 일단락은 또 다른 학교폭력 논란을 계속해서 생산해내는 배경이 된다. (126쪽)
탈퇴를 하면 그게 해결된 일인가? 결국 해명 기회는 없어진 게 아닌가?라는 의문이 남는다는 것이다.
대중들의 지나친 비난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어떤 논란이 터지기라도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특정 장면의 표정과 대화를 짜집기한 영상이 올라오는 걸 꽤 많이 볼 수 있다. '그전부터 인성이 어땠다', '원래 멤버한테 싸가지가 없었다' 등의 이야기로 어그로를 끌고, '사실 쟤 실력도 별로였다'라며 이때다 싶어 논란과 관련 없는 그들의 실력과 외모, 노력까지 비난한다. 그리고 이런 여론에 휘둘린 대중들은 판단을 보류하는 팬들을 후려친다.
어떤 형태든 망설임이 지니는 의의는 그것이 논란으로 이익을 보는 네트워크에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자, 논란의 속도에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된다는 데 있다. (293쪽)
나도 대중의 입장이었기에 책을 읽으면서 반성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아이돌들의 논란에 대한 내 판단이 사실 사이버렉카, 대중, 언론, 알고리즘, SNS 여론에 휘둘린 결과는 아니었을까 싶었다. 나는 그들을 비판하기 전에 인터넷 속 게시물의 사실 여부를 제대로 확인했을까? 사건과 관련 없는 비난에 동조하지는 않았나?
책에 대한 평가를 하자면, 사실 생각보다 별로 재미는 없었다. 일단 내용이 굉장히 빽빽해서 읽고 있으면 조금 피곤하다. 잘 읽히게 정돈된 글은 아닌 것 같다. 절반 정도 읽고 나서 좀 애매했는데 한 200쪽부터는 좀 읽기 싫었고 280쪽쯤에는 얼마 안 남았는데 그냥 뒷부분은 읽지 말까 싶기도 했다.ㅋㅋㅋ 그래도 어떻게 끝까지 다 읽었다. 책이 그렇게 두껍지 않은데 정말 케이팝과 팬심 관련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정보값이 엄청나다. 심지어 앨범 관련 환경 이야기도 잠깐 나온다.
길티 플레저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나도 아이돌의 앨범을 구매하면서 했던 고민과 죄책감들이 있었다.
자본주의에 비판적이면서도 고도 상업주의적인 기획과 마케팅을 기반으로 하는 아이돌 산업을 소비하는 것.
인권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사람을 상품화하는 산업을 소비하는 것.
환경을 사랑하지만 마케팅에 휘둘려 다량의 앨범을 사게 되는 것.
좋아하는 남성 아이돌의 성차별적인 가사나 뮤직비디오를 마주해야 하는 것.
한국이 지금 케이팝 산업에 미쳐서 그렇지 이런 고민들이 비단 아이돌 산업에만 적용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저러한 망설임들이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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